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사법부는 우리 사회의 최후의 보루 같은 존재였다.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가래침도 뱉지만 그 결정에 노골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고 그를 바꿀 수 있는 세력은 더더구나 없어 보였다.
“어쨌건 무죄 (또는 유죄) 판결 났잖아!”하는 소리는 그에 대한 모든 항변을 무력화시켰고 피와 살로 구성된 똑같은 인간인 판사의 판단일 뿐인 판결이 ‘실체적 진실’이 돼 ‘사회적 규범’이 되고 ‘집행의 근거’로서 국민들의 일상을 규정해 왔다. 불만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. 그리고 그 마지못한 복종에는 사법부에 대한 가냘프지만 기본적인 신뢰가 깔려 있었다. 헌법 제 103조 “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.”는 조문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. 신성을 믿었던 남건처럼. 고구려 병사들처럼.
그러나 대법원장을 지냈다는 양승태는 그 믿음을 신성처럼 헌신짝처럼 내버렸다. 헌법보다 권력자의 ‘말씀’에 더 귀를 기울였고 고구려 중 신성이 이세적과 내통했듯 자신의 이익 확보를 위해 한 나라의 사법 체계와 그에 딸린 수많은 이들의 인권을 권력자와 ‘거래’했다. 법원행정처 문건에 등장하는 바 “사법부가 VIP(박근혜 대통령)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”하고 다녔다. 그 내용을 보면 그대로 당나라군 맨 앞에서 “이쪽이옵니다!”를 부르짖는 신성을 목도한 남건의 심경이 된다.
“①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(국가배상 제한 등)
②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사회적 안정을 고려한 판결(이석기, 원세훈, 김기종 사건 등)
③국가경제발전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판결(통상임금, 국공립대학 기성회비 반환, 키코 사건 등)
④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(KTX 승무원, 정리해고,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)
⑤교육 개혁에 초석이 될 수 있는 판결(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)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VIP와 BH에 힘을 보태 옴”.
참 이런 이들이 행한 판결로 인해 국가에 의해 만신창이가 됐던 사법 피해자들이 기껏 받은 배상금을 국가에 되갚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한 나라의 정보 기관 수장이 국기(國基)를 뒤흔든 사건이 적절하게(?) 처리됐으며 법리와 상식에 앞서 '국가 경제‘를 걱정하는 듯 하면서 결국 기득권의 이익을 챙기는 판결이 난무했고 1심과 2심에서 승리했던 KTX 여승무원들은 어이없는 패배를 당했을 뿐 아니라 되물어내야 할 돈의 무게는 한 생명을 앗아갔다. 그래 놓고 “열심히 했지요?” 하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던 대법원장이 “대법원의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.”는 소리를 터진 입이라고 그 혓바닥에 담는다.
쌀에 기생하면서 쌀을 축내고 그 쌀을 못쓰게 만드는 벌레들을 우리는 일컬어 ‘밥벌레’라고 한다. 밥버러지라고 하기도 한다. 그렇다면 법에 기생하면서 법률 체계를 무너뜨리고 법을 허섭쓰레기로 만드는 이들을 우리는 법버러지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. 이 법버러지의 배신을 징치하지 않고, 세스코를 부르든 무슨 약을 치든 이 법버러지들을 몰아내지 않고 우리의 성(城)을 지킬 수 있을까.
적어도 우리는 성문이 열린 다음 망연자실 침략자를 이끄는 신성의 민머리를 보며 허탈해 했던 고구려 백성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. 자살에 실패할만큼 힘 빠진 남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.
더하여 여기는 고립무원의 평양성도 아니다. 우리의 신뢰를 통째로 갈아마신 배신자 법버러지를 처단할 힘은 우리에게 있지 않겠는가. 그 법버러지를 옹위하며 사법 농단을 벌인 새끼 법버러지들도 아울러 콩밥버러지들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. 최소한 그래야 ‘대법원에 대한 신뢰’든 무엇이든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.